[머니톡스] 김연경을 닮은 아이들…농구코트 밝고 발랄한 언더독의 반란
작성자 정보
- 먹튀헌병대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 4 조회
- 목록
본문
(서울=연합뉴스) 윤선희 선임기자 = # 추석 당일 TV 앞,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 준결승전을 지켜보던 고등학생 조카가 코트를 질주하며 골 밑을 파고들던 2000년대생 포워드 이해란 선수를 보며 한 마디를 던졌다. "저 선수 김연경 선수랑 닮았네. 저렇게 생긴 사람들이 운동을 다 잘하나 봐."
얼핏 보니 외모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0대의 눈에 비친 모습은 선수의 이목구비 그 자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리라. 긴 팔다리를 시원하게 뻗어내며 중국의 장신들이 포진한 숲을 헤집고, 득점 후 코트가 떠나가라 포효하며 동료들을 끌어안는 '당당한 표정과 아우라'가 화면에서 김연경을 겹쳐 보게 만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김연경'은 세기의 아이콘이다. 초인적인 능력뿐 아니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침없는 에너지, 위기가 닥치면 동료의 등을 두드려주는 회복 탄력성, 그리고 승리를 부르는 태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나고야=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26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 인터내셔널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 한국 대 일본 결승. 한국 이해란이 슛을 하고 있다. 2026.9.27 [email protected]
오랜 기간 여자 배구의 뜨거운 신드롬 뒤편에서 가려져 있던 한국 여자 농구가 이번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극적인 드라마를 써냈다.
결핍은 위기이지만, 새 엔진을 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자 농구 젊은 대표팀은 국보급 센터 박지수와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가드 박지현이 빠진 절대적 열세에도 중국과 일본을 꺾고 12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명이 빠진 치명적 결핍이 창조적 결핍으로 전환해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강력한 방아쇠로 작용했다.
부족한 높이를 한 발 더 뛰는 풀코트 프레스와 톱니바퀴 같은 스페이싱(공간 창출), 번개 같은 트랜지션(연결)으로 메웠다. '김연경을 닮았다'는 이해란을 비롯해 허예은, 이소희 등 2000년대생 신예들은 선배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한국 스포츠를 짓누르던 비장미와 경직된 상명하복을 덜어내고, 실수를 하이파이브로 털어내고 웃으며 다음을 준비하는 수평적 활력을 보이며 코트를 지배했다. 유연한 '시스템'과 '심리적 안전감'이 영웅이 빠진 조직을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나고야=연합뉴스) 윤동진 기자 = 26일 일본 나고야 아이치 인터내셔널 아레나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 한국 대 일본 결승. 승리를 거둔 대한민국 선수들이 환호하고 있다. 2026.9.26 [email protected]
반면 여자 배구는 김연경 은퇴 이후 세대교체의 진통을 겪으며 2회 연속 노메달(4위)에 그쳤다.
지난 수년간 한국 여자 배구가 김연경을 앞세워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이면에는 짙은 그늘도 드리워 있었다. 조직 내부의 구조적 결함, 유망주 육성의 정체, 현대적 전술 도입의 지연, 안일한 운영 시스템 등이 바로 그것이다. 김연경 선수의 은퇴 이후 국가대표팀의 추락은 한 명의 천재에게 기댄 '영웅 중심 생태계'가 얼마나 취약한 모래성인지를 증명했다.
(영종도=연합뉴스) 이진욱 기자 =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농구 대표팀 선수들이 27일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로 입국,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26.9.27 [email protected]
# 진정한 세대교체는 단순히 간판 인물을 젊은 피로 교체하는 물리적 세대교체에 그치지 않는다.
번뜩이는 천재가 없어도,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굴러가는 정교한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정착시키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역량을 100% 쏟아낼 수 있는 수평적 문화를 구축하는 것이 본질이다.
코트에서 본 '김연경을 닮은 아이들'은 영웅을 모방한 복제품이 아니다. 영웅이 남긴 당당함을 체화하고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판을 짜고 달리는 차세대 시스템 그 자체이다. 이들은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전술적 유연성과 주눅 들지 않는 조직 문화라는 점을 이번 경기에서 보여줬다.
코트 밖에서 성장 정체와 세대교체 갈림길에서 고심하는 수많은 조직은 어떤가.
특히 환경이 급변하고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지식 정보 사회에서, 한 사람의 직관과 결단에 명운을 거는 것은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제왕적 리더의 카리스마가 강력할수록 조직 구성원들은 말 한마디 못 하고 수동적인 명령 수행자로 전락하고, 리더가 교체되거나 판단을 그르치는 순간 조직 전체가 흔들리거나 공백에 빠질 수 있다.
다음 세대가 주눅 들지 않고 마음껏 질주할 수 있는 판을 짜뒀거나 시스템을 잘 정비했는가. 배구가 누린 화려한 조명 뒤에 농구의 잠재력이 숨어 있었듯, 겉으로 드러난 지표 이면에 어떤 체질 개선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그 조직의 진짜 실력은 지금부터 시작된다.